태릉에 피어난 불멸의 무궁화
저자의 말 육군사관학교 생도 1기(육사 10기)로 임관한지 벌써 61주년이 미구에 다가온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야기된 한국전쟁은 이 나라의 간성이 되고자 용약 육사에 입교한 262명에게서 꿈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1949년 7월 육사생도 1기로 선발된 우리들은 푸른 하늘의 높은 기상과 고동치는 맥박을 진정시키며 육사에 입교, 1년간의 수업을 마치려는 즈음에 동족상잔의 전쟁에 무관의 병사로 참전하였다. 위난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한 심정이야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했지만, 당시로서는 최장기간의 장교양성과정을 거친 우수 집단이 그 보람도 없이 무관의 용사로 전선에 투입되었음은 하책(下策) 중의 하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우수한 초급지휘관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사관생도를 한낱 병사로 참전 시킨 것은 국력의 낭비요 에너지의 탕진이었다. 이는 세계의 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도 없는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적의 전면적 공격 징후가 도처에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첩보수집, 분석의 미숙 또는 상황판단의 잘못으로 대비를 소홀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장병을 각종 명목으로 전선을 이탈케 한 수뇌부의 무능무책을 탓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마는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100년대계를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 육사생도 1기 262명과 입교한지 불과 25일밖에 안된 앳된 생도 2기 272명은 혼성으로 생도 대대를 편성, 6월 25일 오후 포천지구 부평리로 출동하였다. 26일부터 치르게 된 부평리전투, 태릉전투, 금곡리전투, 그리고 수원방위전투를 거쳤다. 7월 10일, 대전 도청에 임시로 자리 잡은 육본의 광장에서 생도 1기생은 임관 및 졸업식을 가졌으며 형제지애로 함께 전선을 누비던 생도 2기생들은 계속되는 교육을 받기 위해 헤어져야만 했다. 임관식이라지만 134명만 집결하였고 여타는 전사하였거나 병원에 입원중이거나 불암산 유격대로 돌아갔거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