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장혁주는 1905년 10월 7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구(舊) 한국군 장교였던 장두화의 서자로 태어났다. 생모는 기생이었고 그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자전적 기록은 <인왕동 시대(仁王洞時代)> 및 이를 확대 개작한 장편 ≪고독한 영혼≫ 등 여러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에 나타난 생모에 대한 애증의 감정, 출생과 관련된 생래적 열등의식은 그의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을 생모와 함께 보낸 장혁주는 1919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대구에 있는 친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1920년 기독교 신자인 친부와 적모의 영향으로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5년제 대구고등보통학교에 합격해 학교를 옮기게 된다. 이 무렵 생모의 강요로 네 살 연상의 김귀행과 결혼해 이후 2남 3녀를 두었다. 강요된 조혼과 그로 인한 압박감, 부인에 대한 모멸적인 감정 등은 출생과 관련된 장혁주의 생래적 열등의식을 더욱 깊어지게 하는 요인으로서 그의 자전적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대구고보 3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인 언사를 문제 삼아 돌입한 동맹휴학에 참가해 무기정학을 당했다가 10월경에 복학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 무렵부터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1925년에는 무정부단체인 진우연맹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한다. 1927년경부터 소설에 뜻을 두어 여러 잡지에 투고하기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교원 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어 작품을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투고했지만 몰수당하는 일이 많아지자 일본어 창작에 비중을 두게 된다. 1930년 일본 문단에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농본주의 작가 가토 가즈오와 서신 왕래를 시작해 10월에는 그가 주재하는 잡지 <대지에 서다>에 일본어 단편 <백양목(白楊木)>을 게재했다. 또 1932년에는 <개조>지의 소설 현상 모집에 <아귀도(餓鬼道)>가 2등으로 입선해 일본 문단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조선어 장편으로는 ≪무지개≫, ≪삼곡선≫ 등을 발표했고 일본어 소설 <형의 다리를 자른 남자>, <권이라는 남자>, <쫓기는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1936년 5월 무렵에는 소설가 백신애와 사귀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발각되어 6월 하순에 도쿄로 건너가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하숙집 주인의 친척인 노구치 하나코[통명(通名)은 게이코(桂子)]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고 나가노현 가미스와에서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1939년 2월 장혁주의 친일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주는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을 발표하고 대륙개척문예간화회(大陸開拓文藝懇話會)가 발족하자 이에 참가했으며, 6월에는 척무성 산하 대륙개척문예간화회에서 파견한 제2차 펜부대에 다카미 준, 오다 다케오, 아라키 다카시, 이노우에 유이치로 등과 함께 참가해 3개월간 만주 등을 시찰했다. 1940년 1월 동경주재반도명사좌담회(매일신보 도쿄지국 주최)에 출석하고, 1942년 1월에는 도쿄에서 유진오와 <조선문학의 장래>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이즈음 작가의 행보는 이처럼 친일적 행각을 뚜렷이 했으며 1944년 1월에는 장혁주의 대표적 친일 단편소설집인 ≪이와모토 지원병≫을 출간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에 감격·찬동하는 친일적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제의 패전 이후 장혁주는 자신의 친일 행적에서 기인한 부담감으로 인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하게 된다. 재일 조선인 사회로부터 멸시에 찬 시선과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빈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도 전쟁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일본 민중의 삶을 그린 ≪고아들≫과 같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했으며 1951년에는 매일신문사의 후원으로 한반도로 건너와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그 이듬해 ≪아! 조선(嗚呼朝鮮)≫을 출간하기도 한다. 1952년 10월 일본에 귀화를 신청하고 창씨명이던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를 일본인 이름으로 등록했다. 이때부터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라는 필명을 사용해 재일 조선인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단편 <협박>(1953년), 한국전쟁을 그려낸 ≪무궁화(無窮花)≫(1954년), 자전적 소설 ≪편력의 조서≫(1954년)를 발표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75년 자전적 소설 ≪폭풍의 시≫를 출간한 이후 1976년 취재차 미국을 방문하고 한일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비소설 산문으로 발표하기 시작한다. ≪한과 왜-천손 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는 한반도와 일본 고대인들의 교류를 밝히고자 했으며, ≪도자기와 검-히데요시의 조선 출병과 도공의 도래≫는 임진왜란과 도자기의 교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1991년에는 걸프전 취재를 위해 중동을 다녀왔으며 영문소설 ≪FORLORN JOURNEY≫를 뉴델리에서 출간하는 등 1997년 뇌혈전(腦血栓)으로 사망하기까지 의욕적인 활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