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나약한 감정들.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친아버지라 여겼던 남자가 그러했다. 그것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어 결국은 스스로 지옥으로 밀어 넣고서야 만족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당신이 우리 사이의 경계를 확실히 지켜준다면 이대로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난 당신을 원하고 어쩜 좋아할지도 몰라요. 그냥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더 이상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요. 난 당신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잡아도 돼. 당신이라면 질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지오의 달콤하고 낮은 웃음소리에 이현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지만, 지오는 계속 웃으며 물 컵에서 얼음 덩어리를 하나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이현에게 내밀며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보세요, 우리 관계는 이것과 다르지 않아요. 얼음은 끼리끼리 모여 있을 땐 형체를 잃지 않죠. 하지만 이렇게 무리하게 뜨거운 열에 닿으면…, 녹아버려요. 원하지 않는 뜨거움은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해요. 우린 얼음이에요, 이현씨. 주제를 알고 그냥 이대로 살아요. 난 녹아서 사라지고 싶진 않아요.”
지오가 힘주어 쥔 손안에서 얼음 덩어리가 녹아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흘러 내렸다. 두 사람은 묵묵히 그녀의 손을 보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듯 체온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리는 얼음 덩어리가 격양된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현은 이 순간 분명히 깨달았다. 육체적인 욕망의 근사한 포장 덩어리가 아닌 진실한 감정으로, 사랑이라 부르는 위험한 감정으로 지오를 대한다면 자신이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오는 얼음이다. 가슴 밑바닥까지 얼어붙은 북극의 얼음덩어리.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을 수밖에 없다. 그 가슴의 희미한 불꽃만으로 그녀를 녹이려 끝없이 시도하는 어리석은 바보라 해도.
빌어먹을! 사랑, 그런 건 생각하지 않으리라. 지금은 이 여자를 안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이현은 여자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물기를 천천히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은 겁쟁이야.”
지오가 움찔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자 그는 힘주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의 온기를 전하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 대고 꼭 눌렀다.
“느껴지나? 이건 우리가 함께 녹아 내린 증거야. 우리가 함께 이룰 수 있는 근사한 것들을 미리 포기하는 당신의 나약함을 얼음이란 단어로 포장하려 들지마. 당신의 말은…, 당신이 내게 하고 싶어하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아까부터 지오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지만 굳이 지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